시민 개발은 EUC의 귀환인가?──카미 엑셀이 남긴 역사적 교훈 1/7회
서문
“시민 개발은 DX 시대의 새로운 개발 방식이다”라는 홍보가 무성하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결코 새로울 것이 아니다. 1970년대 후반에 EUC(End User Computing)라는 개념이 등장했고, 1980년대에는 Lotus 1-2-3와 Excel 같은 스프레드시트가 보급되면서 현장 구성원 스스로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상징이 훗날 “카미 엑셀(神 엑셀)”이라고 불리게 되는 존재다. 시민 개발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 그 안에는 단기적 성공과 피할 수 없는 장기적 부정적 유산화라는 보편적 패턴이 숨어 있다.
시리즈 전체
- 시민 개발의 미래를 내다보다──역사·현재·생성 AI·그리고 그 이후 0/7
- 시민 개발은 EUC의 귀환인가?──카미 엑셀이 남긴 역사적 교훈 1/7 (본편)
- 카미 엑셀은 정말 악인가?──구세주에서 부정적 유산으로 2/7
- 현대 시민 개발 플랫폼의 빛과 그림자 3/7
- 생성 AI가 시민 개발에 미치는 영향 4/7
- 거버넌스와 부정적 유산을 피하는 방법 5/7
- 관점의 어긋남이 부정적 유산을 양산한다 6/7
- 레거시는 계속 태어나지만 결국 길들일 수 있다──시민 개발의 미래상 7/7
EUC──현장이 만든 시스템의 시작
EUC(End User Computing)이란, 본래 전문 IT 부서가 담당하던 계산 업무를 엔드유저 스스로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당시 배경은 다음과 같다.
- IT 부서의 자원은 한정적이어서 모든 업무 시스템을 내제화하거나 유지보수할 여유가 없었다.
- 1970년대 말부터 퍼스널 컴퓨터가 보급되었고, 1983년에 Lotus 1-2-3가 등장했다. 이어서 Excel이 합류하면서 비엔지니어도 다룰 수 있는 “도구”가 갖춰졌다.
- 현장 구성원이 직접 업무에 맞는 소규모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고, 생산성의 폭발적 향상을 체감했다.
겉으로 보면 이는 “생산성 혁명”이었다. 하지만 그 산출물은 조직적 거버넌스 바깥에 있었고, 장기적으로는 레거시 자산으로 남게 되었다.
카미 엑셀──구세주에서 부채로
“카미 엑셀”은 스프레드시트로 만든 초거대·다기능 Excel 파일을 비꼬는 표현이다. 어원은 네트 용어인 “네申(신을 뜻하는 속자)”에서 비롯되었으며, 압도적으로 복잡한 Excel을 반쯤 비꼬듯 부르던 이름이었다.
전형적인 카미 엑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원래 데이터베이스나 애플리케이션으로 관리해야 할 것을 Excel 시트에 모두 우겨 넣는다.
- 수천 행에 달하는 매크로, 수십 개의 시트, 복잡하게 상호 참조하는 수식이 얽혀 있다.
- 단기적으로는 “현장의 구세주”로 기능하며 업무 효율을 급격히 끌어올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터져 나온다.
- 전문화: 만든 사람만 전체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 유지보수 불능: 너무 복잡해 다른 사람이 손을 대지 못한다.
- 호환성 문제: Excel 버전이나 OS 차이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렇게 카미 엑셀은 “단기적 성공”과 “장기적 부채”라는 양면성을 지닌 상징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피해야 할 대상으로까지 이야기된다.
패턴화된 부정적 유산화
EUC에서 카미 엑셀, 더 나아가 오늘의 시민 개발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 도입 초기: 현장의 과제를 빠르게 해결하며 폭발적으로 확산한다.
- 중기: 자산이 축적되어 업무의 핵심에 편입된다.
- 장기: 관리 불능이 되고, 이관도 어려워지며 “부정적 유산”이 된다.
이 구조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행동 패턴에 뿌리를 둔다. 단기적 성공 체험이 조직에 인센티브를 주어 장기적 위험을 가볍게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민 개발은 EUC의 재등장인가?
오늘의 시민 개발(노코드·로우코드·RPA 등)은 표면적으로 “클라우드”, “API 연계”, “AI 지원”과 같은 진화를 내세운다.
그러나 본질적 구조는 EUC와 다르지 않다.
- IT 부서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현장이 직접 개발한다.
- 직관적 UI와 풍부한 템플릿 덕분에 단기 성과가 쉽게 나온다.
- 거버넌스가 결여되면 언젠가 “카미 엑셀”과 같은 부정적 유산의 길을 밟는다.
다만 현대 시민 개발에는 EUC 시대에 없던 강점도 존재한다.
- 클라우드 기반이 제공하는 보안과 권한 관리.
- API 연계를 통한 타 시스템과의 통합성.
- 엔터프라이즈용 제품이 거버넌스 통제를 전제로 설계된다는 점.
따라서 시민 개발은 단순한 “EUC의 재탕”이 아니라 **“진화한 EUC”**라고 IT 벤더는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다루는 사람은 어떤가. 생물은 반세기 정도로 진화하지 않는다. 교훈을 살리지 못하면 부정적 유산을 다시 만들어 내는 데 그칠 것이다.
이 글의 요약
- 시민 개발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EUC의 흐름을 잇는 “마케팅적으로는 진화한 재등장”이다.
- 카미 엑셀의 역사는 “단기적 성공과 장기적 부채”의 전형적 사례다.
- 이 구조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과 조직의 인센티브 설계에서 비롯된다.
- 현대 시민 개발은 클라우드·API·거버넌스 기능을 갖췄다고 홍보되지만, 본질적으로 이는 도구 기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